참 기구한 운명이다. 묵묵히 매장에서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벌써 네 번째 주인을 맞아야 할 처지다. 그나마 그들이 네 번째 주인을 마주할 수 있을지도 장담하지 못한다. 2006년부터 510일 간의 긴 투쟁으로 영화 <카트>의 모태가 됐던 홈플러스 노동자들, 더 정확히 말하면 한 때 까르푸의 노동자였고, 한 때 홈에버의 노동자였으며, 지금은 홈플러스의 노동자인데, 곧 해고되거나 누군지 알 수 없는 네 번째 주인을 맞아야 하는 그들의 이야기다.
홈플러스의 주인인 영국 기업 테스코는 지난해 64억 파운드(약 10조 원)의 손실을 냈다. 창사 이래 최악의 적자였다. 게다가 지난해에는 4000억 원 대의 분식회계 사실이 알려지면서 기업 신용도에도 큰 생채기를 입었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테스코의 선택은 해외 자산의 매각이었다. 홈플러스가 현재 인수합병(M&A) 시장에 매물로 나온 이유가 이것이다.
이달 초 테스코 측은 인수전에 뛰어든 여러 회사들로부터 인수 제안서를 받은 뒤 1차 심사를 통해 적격 인수후보를 발표했다. 처음에는 네 곳이 선정됐는데, MBK파트너스와 골드만삭스PIA, 칼라일, 어피니티 등 이름만 들어도 생소하기 짝이 없는 회사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사실 국제 M&A 시장에서는 모두 한 가닥씩 하는 유명한 사모펀드(PEF)들이다. 사모펀드의 특기는 기업을 인수한 뒤 격렬한 구조조정을 통해 경영을 정상화(응?)한 뒤 비싼 가격에 되파는 것이다. 한마디로 경영이 목적이 아니라 싸게 사서, 있는 대로 쥐어짠 이후에, 비싸게 파는 게 목적인 회사다.
이들이 홈플러스를 인수하면 ‘격렬한 구조조정’은 예견된 참사다. 네 번째 주인을 맞은 홈플러스 노동자 상당수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법으로 규제할 방법도 없다. 현행법에 따르면 사모펀드가 한국 기업을 인수하는 데에 어떤 제약도 없다. 구조조정도 새 주인이 하겠다고 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홈플러스에 관심을 보인 이들 중 한 곳이 노동자들의 고용 승계를 보장하려 했다는 사실이 전해진 것이다. 이 기업이 바로 한국의 오리온이다. 그런데도 오리온은 1차 서류 심사(예비 입찰)에서 탈락했다. 인수 가격을 너무 낮게 써 낸 탓이 아닐까 싶었는데 사실 그것도 아니었다.
오리온은 인수 가격으로 6조 5000억 원을 써 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업계에서는 홈플러스의 매각 가격이 5조 원에도 못 미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실제 홈플러스 측도 매각 가격으로 7조 원 정도를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6조 5000억 원을 써낸 오리온이 서류 심사에서 탈락할 정도로 낮은 가격을 써 낸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바로 이 점이 미스터리다.
이 미스터리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추측은 바로 “오리온이 노동자들의 고용 승계를 보장했기 때문에 탈락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지만, 이 설명 외에 오리온이 탈락한 이유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의 고용 승계를 보장했다는 ‘착한 이유’로 국내 기업이 인수전 서류심사에서 탈락해야 했던 속사정이 무엇일까?
2006년의 기억, 명예로웠던 월마트와 돈의 악마였던 까르푸
홈플러스는 매각 과정을 일체 비밀에 부친다. 이른바 깜깜이 매각이다. 그래서 그들이 오리온을 탈락시킨 이유는 오로지 추론을 통해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합리적 추론을 위해 한 가지 되짚어봐야 할 일이 있다. 바로 2006년에 벌어졌던 월마트와 까르푸의 철수 과정이다. 그때의 사정을 보다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2012년 상장회사 CFO(최고재무책임자) 포럼 초청 강연에서 당시의 정황을 밝힌 바 있는 허인철 신세계그룹 경영전략실 사장(현재 오리온 부회장)의 기억을 쫓아가 보자.
허 전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월마트는 공개매각을 했으면 1조 5000억 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돈 이외에 자신들이 제시하는 부대조건을 들어줄 곳이 신세계그룹밖에 없었다는 판단으로, 그들은 고작 8250억 원을 받고 비공개 매각을 진행했다. 그런데 그들이 제시한 부대조건이 뜻밖이었다.”
허 전 사장에 따르면 월마트는 훨씬 비싼 가격에 기업을 팔 수 있었다. 하지만 부대조건을 내 건 탓에 매각 가격을 확 낮춰 싸게 팔았다는 것이다. 그 부대조건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월마트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 것’이었다. 명예를 더럽히지 않는 방법으로 그들이 제시한 조건은 △종업원의 고용 승계를 보장할 것 △협력사들의 계약 기간을 보장할 것 △우수 협력사와 계약을 갱신할 것 등이었다. 월마트는 이 명예를 지키기 위해 1조 5000억 원을 받을 수 있었던 기업을 8250억 원에 팔았다는 것이다.
반면 같은 해 기업을 매각하고 한국을 철수한 까르푸는 달랐다. 다시 허 전 사장의 기억을 쫓아가 보자.
“까르프가 한국에서 철수할 때까지 투자한 금액은 약 1조 1000억 원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공개 매각을 진행하면서 2조 원 이하로는 팔 수 없다고 공언했다. 신세계는 당시 거부의 의사로 1조 3400억 원을 써 냈는데, 나중에 ‘조금 더 쓰면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주겠다’고 연락을 하더라. 복수로 협상 대상자를 선정한 뒤 끊임없이 가격 경쟁을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까르푸는 그들이 원했던 대로 기업을 1조 7500억 원이라는 괜찮은 가격에 팔았다. 인수자는 이랜드그룹이었다. 막대한 자금을 동원한 이랜드는 2007년 비정규직 보호법이 시행되기 직전에 계약직원을 해고하거나 외주 용역으로 돌리려 했다. 영화 카트의 모태가 된 홈에버 노동자들의 기나긴 투쟁이 바로 이때 시작된 것이다.
당시 업계에서는 까르푸가 ‘돈의 악마’가 돼 갖은 꼼수로 가격을 올렸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인수자인 이랜드그룹의 처절한 구조조정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허 전 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월마트는 한국에 투자한 만큼 회수했고, 까르프는 돈을 벌어 갔다. 하지만 윤리 경영 측면에서 보면 까르프가 월마트보다 강하지는 않다”라고.
오리온이 탈락한 슬픈 이유
다시 돌아와, 이번 홈플러스 매각에서 오리온이 탈락한 이유를 추론해보자. 홈플러스의 주인인 테스코는 모기업의 부실 경영으로 7조 원 정도의 실탄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들은 홈플러스를 매각해 이 돈을 마련하려 한다. 그러려면 최대한 인수자들끼리 경쟁을 붙여 가격을 높게 써내도록 해야 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돈이다. 기업을 인수하는 상대가 구조조정을 하건, 노동자를 해고하건 알 바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입찰에 참여한 이들 중 유일하게 오리온이 고용 승계 입장을 밝혔다. 만약 본 입찰이 진행되면 여론이 오리온에게 우호적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다. 아직 국내 시장에서 사모펀드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부정적이다. 기업을 인수한 뒤 알짜 자산을 쏙 빼먹고 먹튀한 사모펀드들의 전례가 한 두 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론이 그렇게 형성된다면, 홈플러스를 사려 하는 다른 사모펀드들도 어쩔 수 없이 고용승계에 대한 입장을 밝혀야 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들이 고용승계를 약속한다면, 자연스럽게 그 대가로 인수 가격을 낮추려 할 것이다. 노동자들을 잔뜩 잘라내야 나중에 기업을 다시 되팔 때 유리한데, 그 짓을 못한다면 비싼 가격을 써 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 같은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홈플러스가 오리온을 사전에 쳐낸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물론 추론에 불과하지만, 이 추론이 아니라면 6조 5000억 원을 써낸 오리온이 서류 심사에서 탈락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 경쟁자가 많을수록 가격이 높아지는 것은 상식 아닌가?
깜깜이 매각, 외국계 자본의 ‘거침없는’ 횡포
홈플러스는 비상장 기업이다. 매각 절차를 공개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자도, 언론도, 심지어 한국 정부도 모르는 방식으로 매각을 진행한다. 이 깜깜이 매각에서 속이 타들어가는 것은 홈플러스의 노동자들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1일 홈플러스 노동조합이 도성환 대표에게 항의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본사를 찾았다. 홈플러스는 본사 현관문을 잠그고 이들의 진입을 막았다. 이튿날 노사 양측은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이 자리에서 노동조합은 대표 면담을 요구했는데, 사측 대표교섭위원(전무)은 “내가 대표의 권한을 위임받고 왔으니 나한테 물어보면 되지 않느냐”고 반론했다.
그래서 노조 측이 그 전무에게 “도대체 매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으며, 고용승계 문제는 어떻게 논의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전무는 “임금협상 자리에서 왜 그런 걸 묻느냐?”고 반문했다. 노조가 다시 “아니, 조금 전에 당신 입으로 대표를 대신해서 이 자리에 나왔고, 물어볼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항의했다. 그 말을 듣자 사측 대표는 “더 할 말이 없다”며 일방적으로 협상 테이블을 떠나버렸다.
거침이 없어도 이렇게 거침이 없을 수는 없다. 노동자들의 생존권이 걸린 문제인데, 대표도 못 만나게 하고, 대표 대신 나왔다는 전무는 질문만 하면 자리를 떠나버린다. “당신들 운명은 내 알 바가 아니니 가만히 닥치고 있다가 해고되면 그냥 잘려라”는 태도다. 하지만 더 슬픈 사실은 이 무지막지한 횡포를 견제할 수단이 없다는 점이다.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면 바로 지금이 그 때다
법적으로 견제할 수단이 없을 때 필요한 것은 사회적 합의와 연대다. “외국 자본이 국내에 유입되면 경제가 좋아진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정부도 지금 이 사태에 대한 분명한 책임이 있다. 돈이면 다 된다며 겁도 없이 시장을 개방해서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28일 민주노총, 참여연대, 한국진보연대 등 7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홈플러스 투기자본 매각 반대 시민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이는 먹튀 행각을 일삼는 투기자본에 홈플러스를 매각하는 것을 막아내겠다는 시민사회의 결의의 산물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모습을 지켜보면 영국기업 테스코는 월마트의 길이 아니라 까르푸의 길을 걸으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2만 6000명에 이르는 홈플러스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지키는 문제는 이제 한국 사회가 감당해야 한다. 삼성그룹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경영권을 두고 한 판 붙었을 때, 한국의 모든 언론은 “외국계 먹튀 자본에게 한국의 대표 그룹을 넘길 수 없다”며 열렬히 삼성을 응원했다. 심지어 어떤 언론은 “이 참에 한국 기업을 쉽게 삼킬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본때를 제대로 보여줘야 다시는 이런 침공이 없을 것”이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사회는 테스코를 향해서도 그 사자후를 똑같이 토해야 한다. 본때를 보여줘 다시는 그들이 한국 노동자들의 삶을 쉽게 좌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회적 연대와 책임은 바로 이럴 때 필요한 것이다.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보다 2만 6000명 홈플러스 노동자들의 생존권이 덜 중요하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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